[세계일보 서아람 변호사] 마약, 시작과 동시에 찾아오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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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4-11-19본문
https://n.news.naver.com/article/022/0003986896
“비행기 타면 죽어요. 대한민국 제발 도와주세요. 필리핀에서 마약 투약한 것을 자수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저의 과대망상으로 어떤 식으로든 죽어서 갈 것 같아서 비행기 못 타겠어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상한 문장입니다. 망상장애나 편집증 증상이 있는 사람이 쓴 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문장은, 며칠 전 한 여성 아나운서의 SNS에 올라왔던 글의 일부입니다. 문제의 글은 올라오자마자 즉시 삭제되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손 빠른 한 누리꾼이 낱낱이 캡처하여 인터넷에 퍼뜨렸습니다.
문제의 글을 보고 사람들은 SNS 계정을 해킹당한 것이 아니냐, 필리핀 범죄조직에 위협당하고 있는 것 아니냐 등의 설을 제기했지만, 그중 가장 유력한 추측은 마약 중독으로 인한 섬망 증상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지인이 신문사와 인터뷰하면서 “도와달라는 글을 보고 메시지로 연락해 보았더니 횡설수설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했다. 마약 급성 중독이 아닌가 의심된다”고 언급하여, 마약 투약설에 더욱 힘이 실렸습니다. 해당 아나운서는 결국 입국과 동시에 마약 검사를 받게 되었고, 양성 반응이 나와 입건 조치되었습니다. 변호인에 따르면, 그녀는 사업차 만난 사람으로부터 손을 묶인 채 강제로 마약을 흡입당했다고 진술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마약을 투약하면 처벌받는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아는데,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자신의 마약 투약을 고백한다고? 그것도 온 세상이 다 지켜보는 인터넷 공간에?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지만, 처음 있는 일도 아닙니다.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유명해진 어느 인플루언서는 자신과 아이돌 가수 모씨가 ‘뽕쟁이’이고, 회사 캐비닛에 주사기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기이한 문장을 SNS에 올렸다가 경찰의 내사를 받았고, 모발에서 필로폰 성분이 검출되면서 인플루언서와 가수 모두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해당 인플루언서는 최근 TV에 출연해 재활치료를 받는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는데, 블랙아웃 상태에서 글을 썼고 곧바로 2층에서 뛰어내렸는데 당시의 기억은 하나도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마약의 효과와 부작용은 그 종류에 따라 다릅니다. 가령 흥분제 계열은 사람을 각성시켜 피로를 느끼지 못하게 하고 엄청난 흥분감과 행복감을 주지만, 진정제 계열은 반대로 사람의 몸과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어 눈을 뜨고 자는 것처럼 무디고 몽롱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마약이든 공통점은, 인체에 백해무익, 아니, 천해무익, 만해무익하다는 것입니다. 마약은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극도의 감각에 인체를 노출시킴으로써 신경계를 순식간에 뒤집어놓고, 쾌락과 고통을 정상적으로 인지하는 기능을 망가뜨립니다.
마약 중독자는 마약이 없는 상태에서는 우울, 피로, 탈진, 불면, 환청, 경련, 통증을 느끼게 되고, 그 고통은 일반적인 인간이 참아낼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결국 중독자는 살기 위해서라도 다시 마약에 손을 대게 되고, 인체의 적응 기제 때문에 금단 증상을 가라앉히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양의 마약을, 더 자주 투여해야만 합니다. 그 끝은 명확합니다. 과다 투여 또는 그 합병증으로 인한 죽음입니다. 마약으로 심신을 잃은 상태에서 위험한 행동을 하다가 죽는 경우도 많습니다. 최근 아르헨티나의 어느 호텔에서 추락사한 영국의 유명 밴드 출신 가수 또한, 부검 결과 체내에서 다량의 코카인과 마약성 진통제가 발견되었습니다. 마약 사건을 다뤄본 법조인들이 ‘마약에 손을 한 번 대는 순간, 자기 사망신고서에 스스로 사인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이유입니다.
호기심에 딱 한 번만 해보는 거라고요? 다시는 손대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요? 마약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바로 그 ‘단 한 번’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려 50만명으로 늘어난 우리나라 마약 중독자 수가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마약의 영향력은 종류뿐만 아니라 배합에 따라, 또 복용하는 사람의 체질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의존성 덜한 마약’이라고 해서 안심해선 안 됩니다. 예전에 어느 TV 프로그램에서는, 12년간 마약사범을 잡으며 활약하던 경찰관이 위장 수사를 위해 마약을 한 번 투약했다가 결국 중독자가 되어 가족까지 잃은 안타까운 사연을 다루기도 했습니다.
혹자는 마약을 법으로 규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도 아니고, 결국 마약을 복용하거나 투여하는 것도 개인의 선택인데, 그걸 국가가 함부로 탄압하고 규제하고 처벌까지 하는 것은 자유권 침해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마약을 원천적으로 없앨 수 없다면, 차라리 일부 마약에 한하여 합법화하고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국가에 국민을 보호하고,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하여야 할 의무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할 의무도 지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뜯어먹게 할 만큼 사람을 파괴하는 ‘좀비마약’이 판치는 이 시대, 마약은 그야말로 ‘재해’가 아닐까요. 원천적으로 없앨 수 없다고 하더라도, 없애야 하는, 없애기 위해 멈추지 않고 고군분투해야 하는 재앙.
익명 메신저로 마약을 주문하면 치킨보다 빨리 배달이 온다는 요즘, 우리는 언제 어디서 유혹에 빠지게 될지 모릅니다. 그때는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한 번만’이라고 하기엔, 우리의 인생 또한 한 번뿐이라는 것을.
서아람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