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SNS 악성게시물, 명예훼손 해당될까 [서아람의 변호사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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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4-03-26본문
https://n.news.naver.com/article/022/0003917933
한 스포츠 선수가 SNS에 올린
일본풍 식당 사진에 ‘매국노’ 낙인
사실 적시와 피해자 특정 어려워
모욕죄 주장 성립 안돼 처벌 불가
검사가 한 사건의 수사를 마무리하고 기소할지, 불기소할지를 결정한 후 그 내용을 적는 서류를 ‘결정문’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검사로 일하면서 결정문을 가장 길게 써 본 건, 살인도, 마약도, 성범죄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시세조종이나 다단계 사기도 아닌, 바로 명예훼손 사건에서였습니다. 그냥 길기만 한 게 아니라, 한 문장 한 문장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부장검사님은 물론이고 차장검사님까지 마주 앉아 연필로 고치고 또 고쳐가며 그야말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던 것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법조인에게 있어서 명예훼손이란, 별것 아닌 것 같은데도 보면 볼수록 참 까다롭고, 애매하고, 사건 결과를 절대 예측할 수 없는 죄명입니다.
요즘 악플이나 악성 게시물 고소가 워낙 흔하다 보니 어떤 게 고소되고, 어떤 게 안 되는지 인터넷에 온갖 ‘썰’들이 떠돕니다. 전문가인 양 행세하는 사람들도 흔히 볼 수 있는데, 복잡한 법리를 극히 부분적으로 듣고 자기가 아는 모든 상황에 적용하려고 하다 보니, 그야말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분명 명예훼손으로 처벌된다고 해서 몇 주 동안 밤을 새워가며 PDF를 땄는데, 아니면 더 심한 경우 비싼 수임료를 주고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결국 불송치나 무혐의 결정이 나고 이의신청, 항고도 전부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런 경우 말입니다. 이쯤 되면 피해자는 그야말로 돌아버릴 지경이 됩니다. 분명 난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내 명예, 내 브랜드의 이미지는 완전히 바닥으로 추락했는데, 왜 처벌할 수 없다는 건지요.
최근 인터넷 뉴스에 명예훼손과 관련된 흥미로운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한 스포츠 선수가 본인의 SNS 계정에 ‘국제선 출발(일본행)’이라고 쓰인 공항 간판의 사진을 올린 겁니다. 그리고 사진에 이런 문구를 덧붙였습니다. “한국에 매국노 왜케 많냐.” 저도 처음 이 사진을 기사에서 봤을 때는 실제 공항이라고만 생각했는데요. 알고 보니 어느 쇼핑몰에 있는 식당의 입구를 찍은 것으로, 쇼핑몰의 콘셉트가 ‘해외여행’이어서, 각 매장은 해당하는 국가의 느낌으로 인테리어나 디자인을 해 두었다고 합니다. 문제의 사진 속에 찍힌 간판은 일본 테마 거리에 걸려 있는 것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는 일본 술과 일본 요리를 파는 음식점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마치 일본에 여행 온 것처럼 현지 분위기와 음식의 맛을 느끼게 해드리겠다, 라는 게 해당 식당의 의도였을 겁니다. 실제로 문제의 쇼핑몰에는 일본풍 업장뿐 아니라 태국풍, 중국풍 매장도 있다고 하니까요.
“내가 음식점 사장이면 그 선수 당장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기사에 달린 댓글 중 하나였습니다. 과연 명예훼손죄가 성립할까요? 일단 답부터 밝히자면 ‘NO’입니다. 명예훼손 범죄가 성립되려면, 가장 먼저 객관적으로 사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는 ‘사실의 적시’가 있어야 합니다. 가령 ‘A씨는 애국심이 부족한 것 같다’는 문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반면, ‘A씨는 친일파의 자손이다’라는 문장은 ‘사실’에 해당합니다. 또한 해당 발언이나 게시물이 여러 사람에게 순차적으로 또는 동시에 전해지는 것이라는 ‘공연성’이 있어야 하고, 피해자의 평판을 실추시키려는 ‘고의’가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문제의 발언이 누구에 관한 것인지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특정’이 되어야 합니다. 고의나 공연성은 그나마 판단이 쉬운 편이지만, 피해자 특정에 관한 문제는 정말 어렵습니다.
일본풍 음식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이 사건에서는 두 가지 요건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바로 ‘사실 적시’와 ‘피해자 특정’입니다. 물론 사실 적시가 없다고 하더라도, ‘매국노’라는 표현을 가지고 모욕죄라는 주장을 해 볼 수는 있지만, 여전히 피해자 특정 부분이 걸립니다. 물론, 피해자 특정이 반드시 가게 상호나 업주 이름을 밝히거나, 주소를 공개하거나 하는 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사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피해자 특정은 가능합니다. 가장 쉽게 특정되는 건 바로 알아보기 쉽게 나온 피해자의 얼굴 사진을 올리는 것입니다. 얼굴이 보이게 찍힌 폐쇄회로(CC)TV 영상 캡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급심 판례 중에는, 게시물 자체에 피해자 사진을 올린 게 아니라, 피해자가 스스로 자기 사진을 많이 올려놓은 SNS 주소를 링크해놓은 것도 피해자를 특정한 것이라고 본 사례가 있습니다. 회사나 업장도 마찬가지로 사진을 통해 특정될 수 있습니다. 2019년 하급심 판례 중에는, 기자가 기사를 쓰면서 CCTV 안내문과 전원주택 주변 구조물을 촬영한 사진을 첨부하고, 그 CCTV가 특정 동네에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기사에 적었다면, 그곳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기사의 등장인물이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을 인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직 우리가 수학 공식처럼 간단히 적용할 수 있는 특정성 판단의 기준은 없습니다. 다만, 특정성은 갈수록 더 쉽게 인정되는 방향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원래 판례는 아이디나 닉네임만 부르는 것은 피해자 특정이 아니라고 보았지만, 그 후 나온 판례들은 ‘원래 아는 사이끼리 게임하면서 닉네임을 부른 경우’, ‘오프라인 모임을 자주 갖는 커뮤니티에서 닉네임을 부른 경우’, ‘닉네임이나 예명 자체가 실명을 대체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경우’ 등은 특정을 인정하는 것으로 범위를 넓혀왔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단서 하나만으로도 한 사람의 신상을 속속들이 알아낼 수 있는 무서운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지 검색이나 인공지능(AI) 검색이 생긴 덕분에, 지나가다 예쁜 옷을 보고 사진 찍어서 포털 사이트에 돌려보면 어느 브랜드에서 몇 연도에 출시된 얼마짜리 옷인지 단 3초 만에 알아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은 건 없습니다. 조심, 또 조심하는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