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아람 변호사의 학폭대책심의위원회 활동기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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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4-02-27본문
1화. 학폭위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며]
올해부터 수도권 소재 교육지원청에서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줄여서 ‘학폭위’ 심의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심의위 일은 항상 해보고 싶었지만, 검사로 일할 때는 법령상 자격이 되지 않았고, 퇴직 직후에는 이미 하반기여서 지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작년에는 일이 너무 바빠 지원 공고가 나는 것도 모르고 지나갔는데, 올해는 지원 공고가 나기 전부터 교육지원청 홈페이지를 미리 즐겨찾기 해놓고 계속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또 일이 바빠 깜박하고 말았는데, 다행히 저의 일정 지킴이(?)인 세대주님(AKA 남의 편)께서 본인이 어디 교육청에 지원했다고 알려주신 덕분에 저도 후다닥 뒤늦게 지원서를 낼 수 있었습니다.
매해 2월 초순부터 중순까지 수도권 전역에 있는 수십 개의 교육지원청에서 거의 동시에 학폭심의위원을 모집하기 때문에, 그중 어디를 지원할지는 상당히 고민되는 문제입니다. 중복지원이 원칙적으로 가능하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순위가 밀린다거나 아예 탈락당하는 등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지원서류에 ‘중복지원’ 여부와 중복지원을 했다면 어디 어디를 썼는지를 자세히 쓰게 되어 있고, 서울이나 수도권 소재 교육지원청은 중복지원자는 가능한 한 뽑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도 이미 심의위 경험이 있으신 다른 변호사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제가 지원한 곳은, 제가 일하는 수원 지역과는 아예 다른 행정 지역이었습니다. 학폭심의위원이 되면 적용되는 ‘해당 지역 수임 제한’의 불편을 최대한 줄이려면 수원과 멀리 떨어질수록 좋긴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지원한 그 지역이, 바로 전국에서도 교육열이 엄청나게 높기로 손꼽히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검사 및 변호사로서의 제 경험상, ‘높은 교육열=많은 학폭 사건=치열한 다툼’이라는 공식이 성립합니다. 아무래도 그런 지역일수록 학부모님들이 아이의 학교생활에 특히 관심이 많고,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에도 상당히 예민하고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겠지요. 당연히 심의도 까다롭고 힘들어지지만, 심의위원으로서 또 변호사로서 배우고 성장하는 속도도 빨라지기 때문에 단기간에 ‘고속 압축 성장’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해서 올해부터 학폭심의위원회 전문위원(변호사 또는 경찰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요. 그야말로 학폭 사건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직접 다루는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된 만큼, 앞으로 일 년간 학폭위에서 제가 배우고 느끼는 것들을 연재 형식으로 적어 보려고 합니다. 심의위원회 업무 보안 및 당사자 학생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당연히 실제 사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을 것이고요. 만일 사례를 설명하여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경우, 실제 사례와는 완전히 다르게 각색하여 소설 형식으로 표현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학폭위에 지원하게 되었는지]
돌이켜보면 검사로 일하는 동안 유독 어린 아동이나 청소년 관련 사건을 맡게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따로 지망하지 않았는데도 소년 수사 전담, 소년범죄 전담 재판을 담당한 적도 몇 번 있었고, 가정폭력 사건 전담을 하면서 아동 피해자, 청소년 피해자들과 면담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친어머니에게 학대당하다가 결국 사망한 아동 피해자의 사망사건을 공판 검사로 진행하면서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가끔 검찰청 밖으로 나가서 초등학교나 중학교 준법 강연을 갈 때면 유독 즐거웠던 기억도 있고요. 제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로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습니다. 변호사가 된 후로 작가 활동을 병행하면서 동화를 쓰게 된 것도, 기존의 전담 분야였던 보이스피싱과 함께 학폭 사건을 메인으로 맡게 된 것도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아이들이 나중에 살아갈 세상을 더 안전하고,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곳으로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요.
지난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형사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활동한 기간에 비해 무척 많은 학폭 사건을 다루어 보았고 심의위원회에도 다수 참석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과정과 결과를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위원회 회의보다는 그렇지 않은 회의가 수적으로 더 많았습니다. 심지어 법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하여(“이유가 어떻든 신체 접촉이 발생하기만 하면 그걸로 미필적 고의가 인정되는 거다”라는 발언을 어떤 학폭 위원장님께서 하시더군요. ‘미필적 고의’의 개념을 전혀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저희가 불복하는 행정심판이나 행정소송을 걸어 승소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형사사건으로 다룰 수 있는 범위보다 학교폭력으로 다룰 수 있는 범위가 훨씬 넓은 현재의 법 체계상, 학교폭력 문제에 대한 해결 권한은 교육청과 학폭위에 전적으로 집중된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일선에서 실제로 겪어보면 현재의 학폭위는 전문가 위원의 부족과 지나치게 많은 심의 건수, 심의 시간 부족 등으로 사건 당사자들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도출하고 유야무야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듭니다. 물론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겠지만, 제도라는 게 그렇게 하루 아침에 뚝딱 고쳐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지금의 인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내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겠지요. 매번 학폭위의 반대편에 서서 따지고 다투는 일만 해 왔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한 번 해보자, 싶었습니다. 학폭 사건의 진짜 전문가가 되려면,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도 서 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첫인상]
역량강화연수, 요즘엔 OT를 그렇게 부르나 봅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하는 연수에 참석하기 위하여 교육지원청 건물에 들어섰습니다. 심의위에 참석하러 전국의 교육지원청을 돌아다닐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 시설이 좋습니다. 검찰청이나 경찰 같은 수사기관에 비해서 어쩌면 이렇게 세련되고 깨끗할까, 싶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예산에서 오는 건가) 혼자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다만 엘리베이터가 없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제가 계단을 올라가기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주 3회 천국의 계단 한 시간씩 타는 여자). 저는 스물 여덟 살부터 스물 아홉 살까지 꼬박 일 년 동안 심한 분쇄골절상으로 휠체어 생활을 했는데,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어서인지 공용시설이나 공용건물에 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터나 승강기가 없는 걸 보면 그렇게 화가 납니다(-_-). 만일 오늘 참석하는 위원 중 장애가 있는 분이 있으셨다면, 연수에 참석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셔야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반면, 연수 자체는 정말 세심하게 공들여 준비하신 느낌이었습니다. 심지어 음료수조차 생수와 아메리카노, 라떼로 나뉘어져 원하는 취향대로 가지고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하지만 만년 유지어터가 고를 수 있는 건 생수뿐이어서 슬펐습니다). 보통 이런 종류의 행사에서는 사전 준비가 조금이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부분이 생기고 안 맞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인데(나름 공무원 생활 11년), 그런 부분이 전혀 없었던 걸 보아 교육지원청 측에서 사전 준비를 정말 철저히 하셨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다만, 교육지원청 측의 성의 가득한 준비와 무관하게, 기존부터 활동해 온 것으로 보이는 열 명 남짓의 위원들이 굉장히 시끄럽게 웃고 떠들면서 계속 농담을 하고 산만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심지어 연수나 강의를 시작하려고 하는데도 그 소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다른 지역 심의위원회에서도 이런 문제가 있어, 가령 위원들이 친목에만 너무 집중한다든가, 밥 메뉴에 관해 한참 동안 시간을 잡아 먹어가며 열띤 토론을 벌인다든가, 서로 친해지다 보니 회의에서도 쉽게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고 그냥 다수의 의견에 따라가버리는 일이 왕왕 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의사결정이 필요한 회의체에서 사적인 친목은 무조건 배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기존 위원 중 신규 위원의 비중이 매우 적어 보였는데, 아예 해마다 위원을 과반수 이상 교체해서 서로 개인적인 관계를 만들지 못하게 예방한다거나 하는 조치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물론 지금처럼 심의위원 자체를 원하는 수준의 인력으로 다 채우지 못하는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만).
[오전 연수]
오전 시간에는 주로 학폭 사건의 처리 절차와 심의위원회 운영 방식, 처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심의위원으로서 주의할 점 등에 대하여 강의를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학폭 처리 절차에 대해서 누구보다 정통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오만이고 착각이었음을 깨닫고 반성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작년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개정된 지침과 바뀐 절차가 너무 많아, 저도 놓치고 있는 부분이 많았더라고요. 학폭제로센터, 학폭 전담 수사관 등 기존에는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제도들이 생겨나고 또 학폭 사건에 있어서 중요한 절차로 자리잡으면서, 앞으로의 학폭 사건 처리 양상은 기존까지와는 상당히 달라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제가 서울대 법대에 다닐 시절에, 동기들과 ‘(법학 중에서) 어떤 과목을 전공하는 게 가장 최악인지’를 주제로 토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들 앞다투어 얘기했던 게 바로 ‘세법’이었는데요. 세법은 거의 매년 내용이 완전히 바뀐다고 해도 될 정도로 워낙 개정이 많아서, 교수가 되더라도 단 한 순간도 안심하지 못하고 계속 공부하고 또 하고 평생 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학폭 처리 시스템도 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계속 바뀌고 있지요. 학폭위를 통한 학폭 해결 프로세스 자체가 도입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는 단계인 것 같습니다.
[오후 연수]
점심시간이 끝나고 이어진 오후 연수에서는 앞으로 개최될 위원회 일정이나 소집 방식 등 실무적인 부분에 대한 안내를 받은 다음, 3월부터 곧바로 시작할 정식 심의위원회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하여 모의 심의를 해보았습니다. 모의 사안에서 피해 학생과 가해 학생, 그리고 보호자를 맡아주신 분들의 열연에 모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저도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자꾸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실제 심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모습들을 너무나도 실감 나게 그려내시는 게, 제가 좋아하는 ‘충주맨’ 유튜브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모의 심의이고 첫날이다 보니 대부분의 위원들, 특히 신규 위원님들은 사안지를 열심히 읽고 메모하고 고민하시는 듯했지만 정작 심의 참여에 매우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위원장/ 그 위원들이 심의를 주도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이 조금 염려스럽기는 했습니다. 가뜩이나 전문위원이 부족해서 법리나 절차에 대하여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시점에서, 카리스마 있고 연륜 있는 위원장이 어떤 특정한 의견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고 한다면, 그걸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중립적이고 균형된 심의 결과가 도출될 텐데 말입니다. 일단 오늘은 첫 날이니 앞으로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치며]
예상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배우고, 또 생각하고 돌아온 학폭위 연수였습니다. 3월 초부터 곧바로 심의가 시작될 예정이니, 작년과 다르게 달라진 절차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학폭심의위 현장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제가 표현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표현해도 되는 적절한 범위 안에서) 글로 엮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