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일보] 연예인 이미지와 광고 위약금 [서아람의 변호사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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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4-04-16본문
https://n.news.naver.com/article/022/0003924553
유명 스타들 잇단 스캔들로 추락
품위 유지약정 위배로 거액 배상
계약 전 벌어진 학폭은 예외 판결
윤리 강제 가혹하지만 의무 따라
“아무 이유도 없이 90분 동안 따귀를 때렸다.” 조직폭력배 얘기가 아닙니다. 매력적인 외모, 뚜렷한 개성, 탄탄한 연기력을 인정받아 스타로 떠오르던 두 여배우가 연달아 학교폭력 논란에 휘말렸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상간녀다, 아니다. 환승연애다, 아니다. 셀프 열애설이다, 아니다. 요즘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스캔들이 터져 나옵니다. 학폭, 마약, 불륜, 탈세, 음주운전, 갑질 등으로 연예인의 이미지가 추락하면,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사람들이 있는데요. 첫 번째는 당연히 팬들이고, 두 번째는 해당 연예인이 소속된 회사의 주주들이고, 세 번째는 해당 연예인이 나오는 광고의 광고주들입니다.
요즘 소비자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 연예인이 광고에 나오면, 신속하게 SNS에, 인터넷 커뮤니티에, 광고사 홈페이지에 ‘꼴 보기 싫다’는 글을 올립니다. 해당 사안이 범죄이거나 그에 준할 정도로 심각할 경우, 불매 운동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광고사들은 이런 문제에 있어 누구보다 예민합니다. 모델 관련 루머가 터지면 광고사들은 허둥지둥 계약을 해지하고, 광고판과 현수막을 내리고, 홈페이지 메인 화면을 바꾸느라 비상이 걸립니다.
앞으로 발생할 매출 하락은 어떻게 막았다지만, 이미 생긴 손해까지 메울 수는 없습니다. 수십억원의 돈을 들여 만든 광고 캠페인을 영영 쓸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당 브랜드나 기업의 이름이 스캔들과 연관되어 수백 번, 수천 번 언급되고 보도되면서 경제적으로 환산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이미지가 추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노한 광고주들은 소송에 나섭니다.
2000년대 초반, 아파트 분양 광고에 출연했던 여배우 K는 배우자와의 폭행 사건에 대해 언론 인터뷰를 하면서 부은 얼굴을 공개했는데, 건설회사는 ‘가족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아파트’ 이미지를 망쳐버렸다며 무려 30억5000만원을 청구했습니다. 예능인 J는 불법 도박으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후 모델을 했던 자동차용품업체로부터 20억원을 청구받았지만, 조정을 통해 7억원을 배상하고 끝났습니다. 멤버 왕따 루머에 시달렸던 걸그룹 L의 소속사는 광고주인 아웃도어 브랜드에 4억원을 배상했고, 불륜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여배우 P는 ‘신비롭고 깨끗한’ 이미지를 내세운 광고를 해오던 화장품 회사에 위약금을 물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떤 근거로, 광고사들은 연예인에게 거액을 청구하는 것일까요? 광고주가 모델이나 연예인, 운동선수, 개그맨 등과 광고모델 계약을 할 때, 이 계약에는 보통 ‘품위 유지 약정’이라는 것이 들어갑니다. 미국의 ‘Moral clause(윤리 조항)’를 따온 것인데요. 그 역사가 무려 1921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910년대 미국의 최정상급 인기 코미디언이었던 로스코 아버클이 배우 지망생이었던 소녀 버지니아를 강간하던 중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혐의로 기소당한 사건을 계기로,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연예인과 계약할 때 ‘윤리와 사회 관습에 따른 책임을 다한다’는 취지의 조항을 넣게 되었던 것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로스코 아버클은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유명해지고 싶었던 배우 지망생 밤비나의 거짓 증언과, 주지사에 출마하기 위해 역사적인 승리가 필요했던 지방 검사 매슈의 위증 교사가 아무 죄 없는 로스코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 이혼당하게 하고, 연예계를 은퇴하게 했던 것이죠.
잠시 이야기가 샜는데요. 이런 유래로 만들어진 품위 유지 조항은 분명히 법적 효력이 있고, 이를 위반한 당사자는 계약 상대방에게 채무불이행에 대한 손해배상을 해주어야 합니다. 최근에는 광고모델 계약뿐만 아니라 연예인이나 유튜브 크리에이이터와 기획사 간 전속계약, 방송사와의 프로그램 출연 계약, ‘일타강사’라고 불리는 유명 학원 강사들의 강의 계약에도 이 조항이 들어가곤 합니다. 그렇다면 손해배상액은 어떤 기준으로 계산할까요? ‘이미지 추락’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는 매우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보통 위약금은 ‘계약금의 몇 배’, ‘몇 개월분 광고대금’ 이런 식으로 미리 약정해놓고 청구하고, 법원에서는 너무 많다고 판단되면 적당히 감액하는 판결을 내려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학창 시절 학폭했던 게 밝혀진 경우에도 광고 위약금을 물까요? 이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놀랍게도 ‘NO’입니다. ‘남자친구 가스라이팅’과 ‘중학교 일진 학교폭력’, 그리고 ‘학력위조’ 논란이 일었던 배우 A와 광고주인 유산균 제품 업체의 민사소송이 판례가 되었는데요. 배우 A는 광고주에게 수억원의 위약금을 물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입니다. 법원에서는 배우 A의 각종 논란이 ‘전부 계약 체결 전에 있었던 일이고, 이를 계약 교섭 과정에서 밝히라고 강요하는 것은 헌법상 기본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위약금 청구를 기각하였습니다. 그 대신, 배우 A와 광고주 사이의 계약은 신뢰 관계가 깨져 도저히 유지될 수 없다고 하면서, 남은 계약기간만큼의 모델료인 2억5000만원 상당을 반환하라고 판결한 것입니다.
손해배상이든, 모델료 반환이든, 집 한 채 값이 왔다 갔다 한다는 건 변함없습니다. 연예인이 성직자도 아닌데 윤리까지 강제하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싶다가도, 결국 이 모든 게 자본의 논리라는 걸 생각하면 어느 정도 납득하게 됩니다.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의 명대사가 떠오르네요. Great power comes with great responsibity. 높은 계약금에는 많은 의무가 따라오나 봅니다.
서아람 변호사